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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굴(서당굴)을 찾아

산과마라톤 2011. 5. 26. 13:47

 

 

 

 

 

 

 

 

 

 

 

 

 

 

 

 

 

 

 

 

 

 

 

 

 

 

 

원효굴(서당굴)안에서 본 바깥세상

전설에 따른 원효굴 탐사 소개문 (매일신문 88년 11월 4일자에 <원효대사 득도 석굴 발견>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을 적어본다.
해발 1050m 청운대 정상 가까이의 절벽에서 원효굴을 찾았다.
굴의 규모는 길이 280cm, 굴입구 높이 80cm의 둥근 원통형의 굴엔 쌍봉 낙타모양의 두 돌기가 파여 올라가 있다. 이 굴은 청운대 천인 절벽의 정남면에 남향하여 인공으로 굴착한 횡혈(橫穴)석굴이다.
겨울에는 햇볕이 굴 안에까지 들어가고, 여름에는 굴 안에 햇볕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굴의 맞은편 굴에 아래로 100m 가량 떨어진 밑에 남에서 북으로 굴착한 석굴이 있다. 이 굴은 이 원효굴과 굴의 방향이 마주보고 있다.
이 굴의 뒤에서 쳐다보면 원효굴이 보인다. 아마도 원효굴과 유관한 굴일 것이다. 제자 상좌나 시종자(侍從者)들이 거처했을 것 같다. 이 굴은 안으로 길이 1.7m, 굴 높이 1.8m, 넓이 1.7m이다.
원효굴의 입구 오른편 절벽에 명문(銘文)이 조각되어 있다. 글씨 석자가 조각되어 있다. 가로 세로 7cm 가량의 크기로 썼다. 위의 글자는 서(誓)자가 확실하다. 그러나 밑의 두 자는 마모가 심하여 매우 판독하기
어렵다. 둘째 자는 당(幢)자로 읽힐 가능서이 농후하고, 셋째 자는 굴(窟)자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당(幢)자와 굴(窟)자를 합아면 서당굴(誓幢窟)로 판독하여 지금도 서당굴(誓幢窟)로 읽히고, 글자체는 해서체다. 이 서당굴(誓幢窟)은 원효가 유명하게 되자 그의 법사들에 의하여 기념하기 위하여 각자(刻字, 글자를 새기는 것)했다고 보겠다. 글자의 마모 상태나 자체로 보아 신라시대의 각서(刻書)로 보겠다.
이 석굴까지 가는 길은 절벽에 옆으로 난 祖道를 따라 오르내리며 비스듬이 올라간다. 극히 위험한 길이고, 길 아래는 수백 미터의 절벽이다. 원효 당년에는 운제(雲梯) 위잔(危棧)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랜 구비 전승과 이 원효굴은 신기하게도 부합되었다.
이 굴은 오도암(悟道庵)에 딸린 수도석굴이다. 이 굴은 천고의 신비 가려 운무속에 감춰져 내려왔다.
오도암은 1963년이래 폐사가 되어 유허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기왓장과 주초와 맷돌 바위만이 널려있고, 빼어난 상호의 불상과 고탱화가 당시까지 전세(傳世, 대대로 전하여 가는 것)되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이상이 발굴 당시의 내용이다.
해발 800m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남향으로 원효가 오도암(悟道庵)과 원효굴(서당굴)에서 오도했다는 전승은 사실로 전한다.

 

2011.05.20 매일신문[경북의 혼] 제2부-나라사랑      5)통일의 주역, 화랑
유신과 원효, 팔공산 석굴서 홀로 정진…꿈꾸는 세상을 하늘에 고했다

옛날 화랑(花郞)들이 불렀다는 '도령가'(徒領歌)도 이랬을까? 신라 풍류(風流)와 화랑 연구에 매달렸던 학자 김정설(金鼎卨)이 지은 '화랑가'(花郞歌)이다. "진흥왕 때 '도령가'가 있었다는데 그 내용은 알 길 없고 하도 궁금해서 직접 썼다"는 노래다.석굴에서 싹트다

패망한 가야국 왕족 출신으로 신라 화랑을 대표하는 김유신(595~673)과 왕도 경주 아닌 먼 압량에서 태어나 화랑교육을 받았고, 출가와 환속으로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한국 불교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각자 원효(617∼686).

화랑 인연을 가진 두 사람의 흔적이 남은 팔공산 암석 절벽인 청운대(靑雲臺)에 있다는 석굴(石窟)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이 17세 때 '중악(中嶽)의 석굴로 홀로 들어가 하늘에 고하고 맹세를 했다'는 현장은 깎아지른 수직 암벽을 휘감은 바람길에 있었다.

길이 3m, 높이 1m 정도의 석굴은 김유신과 특별한 관계인 원효(김유신 여동생은 김춘추의 부인이 됐고,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는 원효와 인연을 맺음)가 6년간 수행했다는 곳이다. 이 때문에 서당굴(誓幢堀`원효의 어릴적 이름) 원효굴 장군굴 등으로 불린다.

원효가 수행했다는 오도암(悟道庵) 뒤쪽 수직 암벽의 석굴 바로 앞에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족대(足臺)와 등받이까지 갖춘 좌선대(座禪臺)가 세상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석굴 바위 틈 사이로 떨어진 장군수(將軍水)가 고인 물은 발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시렸다. 석굴 밖으로는 멀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팔공산 비로봉 제천단이 아련했다. 석굴 아래 계곡 건너편 수목에 가린 시좌굴(侍佐堀)엔 김유신과 연개소문(淵蓋蘇文) 간에 얽힌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마을 주민들과 군위군의 협조 아래 밧줄에 의지해 겨우 다다른 석굴은 김유신이 만났다는 노인의 말처럼 '독사와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땅'에 위치해 있었다. 일행 앞에 갑자기 나타난 뱀은 옛날 이곳에 맹수들이 있었다는 주민 이야기를 실감케 했다. 주민들은 "날씨가 잘 따라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김유신은 무엇을 빌었을까. 원효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런 험난한 곳을 찾았을까.

김유신은 '범이나 이리 떼처럼 침략하여 괴롭히는 적국'의 화란(禍亂)에서 조국을 구할 삼국 통일을 소원했으리라. 원효 역시 끊임없는 전쟁과 번민에 시달리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누구나 평등한 정토(淨土) 사회 구현을 위한 '첫 새벽'을 열기를 빌었으리라. 원효의 아명(兒名)인 '서당'의 또 다른 이름인 '새부'(塞部)가 신라말로 '새벽'을 뜻했듯이 그의 법명(원효)처럼 대중불교의 '첫 새벽'을 열고자 이 석굴을 찾았을 터이다.

팔공산은 신라 오악(五嶽)의 하나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비로봉 제천단이 있던 곳이다. 군위 삼존석굴(제2 석굴암)과 관봉(冠峰)석조여래좌상(갓바위)를 비롯해 유서 깊은 동화사(桐華寺) 등 불교와 인연 많은 산이다. 삼국 통일의 소원을 하늘에 고했던 김유신의 맹세와 평등한 정토세상을 꿈꿨던 원효의 발원(發願)은 이곳 석굴에서 시작됐고,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일까.

신라의 비주류였던 김유신과 원효가 또 다른 비주류였던 김춘추를 만나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일과 신라 불교의 완성이라는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팔공산에서 그 단초를 놓았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명산에서 기른 호연지기를 바탕으로 신라 천년의 주춧돌을 놓았다. 좀 더 넓히자면 이 두 사람이 유불도 삼교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그런 개방적인 현묘지도(玄妙之道) 즉 풍류를 가진 화랑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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