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 후 :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 면 적 : 301,245㎢ (한반도의 약 1.4배. 산지와 구릉이 많고 평야는 전국토의 1/5)
• 인 구 : 5,747만명
• 수 도 : 로마(Rome, 280만명)
• 주요도시 : 로마(Roma), 밀라노(Milan), 나폴리(Napoli)
• 주요언어 : 이태리어
• 종 교 : 카톨릭(98%)
• 국제전화 : 호텔객실 내에서 전화하시면 요금이 비싸므로 가급적 현지에서 전화카드를 구입하
시거나 콜렉트콜(수신자부담)을 이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수신자부담요령 : 800-172-222 +한국어안내에 따라 사용하시면 됩니다)
• 시 차 : -8시간 (썸머타임 -7시간 : 3월말 ~ 10월말까지)
• 이태리의 기후
이탈리아는 4계절의 변화가 분명하지만,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기후보다 약간 덥다. 그러나 북부지역은 아페니뇨 산맥의 영향으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의 평균기온은29℃, 겨울의 평균 기온은 9℃정도로 온난하다. 강수량은 연평균 600-1,000mm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증가한다. 강수일수는 계절적으로 편중되지는 않았으나 주로 가을에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햇볕이 강렬하나 습기가 없어 지낼만하다.
• 지리
유럽대륙으로부터 지중해쪽으로 긴 장화 모양을 하고 있는 길이 약 1,170㎞의 반도국가인 이탈리아는 반도와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반이 불안정하여 지진이 잦으며, 시칠리아섬의 에트나산은 유럽 최고의 화산으로 화산운동을 하고 있는 분화구와 900여개가 넘는 기생화산이 있다.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접하고, 서쪽은 시칠리아·사르데냐섬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은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다.
• 로마
ROMA 를 거꾸로 하면 AMOR!!
사랑의 도시 '로마'는 한마디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소유한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옛 유적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문명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소매치기와 좀도둑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군사와 전쟁을 주관하는 신(神)인 마르스(MARS)와 인간인 레아 실비아(Rhea sivia)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동이 형제 레무스(REMUS)와 로물루스(ROMULUS)에 의해서 건국 되었다고 한다. 태어난후 티베레강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를 암늑대가 젖으로 키웠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같은 로마를 세운 시조로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티베레강 하류에 접해 있으며, 대부분이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한 '영원의 도시'이다. 이탈리아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특히 바티칸은 카톨릭의 총본산으로 카톨릭과 관계된 국제적인 연구·교육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로마의 주요산업은 관광업으로 연간 천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고대부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육지, 수상교통의 중심지로 로마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
• 나폴리 (Napoli)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See Naple and die)라는 말이 있듯이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전원 풍경을 느긋히 즐기면서 두시간을 달리면 평온하고 목가적인 도시 나폴리를 만난다.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인 나폴리에서는 신이라도 지나치지 못하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인이 이 땅에 온 이래 통치자는 몇번이나 바뀌었지만 남 이탈리아의 중심 대도시로 발전해 왔다. 각각의 시대의 소중한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부르폰가의 시대의 산 카를로 극장(Teatro San Carlo), 이탈리아의 삼대 극장중의 하나로 17세기의 왕궁 Palazzo Reale을 시작으로 대성당인 두오모, 긴역사를 가진 도시의 거리 스파카 나폴리(Spacca Napoli), 안쥬가의 누오보성(Castel Nuovo), 카포디몬테국립미술관)Museo e Gallerie Nazionale di Capodimonte),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useo Aecheologico Nazionale)등 유수의 관광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또한 나폴리에는 2개의 섬이 있다. 카프리섬(Isola di Capri)과 이스치아섬(Isola d' Ischia)으로 나폴리만에서 페리고 1시간정도 걸리면 닿는 아름다운 섬이다.
• 폼페이 (Pompeii)
서기 79년 8월 번영하던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와 2만여명의 주민이 화산재에 파묻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가 완전히 화산속에 덮여버리는 폭발 이전에 몇차례 경고를 했었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한 순간에 손써볼 겨를도 없이 고대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미라의 형상으로 화산재에 뒤덮혀 최후를 맞게 되었다.
베수비오 화산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폼페이를 삼켜버렸을 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높은 리조트 도시였고 농업, 상업도 발달해 있었다.
BC 62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시민들이 힘을 합쳐 주택과 사원들을 재건해 겨우 재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BC 79년 신의 분노라고는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고스란히 화산재 속에 묻히고 말았다. 강진을 동반한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분철한 화산재가 무려 1m가까이나 쌓였었고, 나폴리의 하늘을 검게 뒤덮었다. 교외로 도망치는 사람, 집안에서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피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내린 비로 인해 분출한 화산재와 용암이 응결하면서 거리 전체가 마치 찌는 솥과 같은 형상이 되면서 도시전체가 그대로 매몰되었던 것이다. 그 후 잔디와 덩굴식물들이 자라 그 자리를 덮게 되면서 폼페이란 도시라는 이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그리고 1500년 동안 역사의 저편에 사라져 있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심스러운 발굴작업은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로 당시의 폼페이인들의 문화와 예술, 건축수준을 짐작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폼페이가 로마제국으로 편입됬을때 로마인들은 폼페이를 지리적,지형적 특성에 맞게 고쳐나갔다. 자갈로 포장된 도로에 하수로가 있었기 때문에 보행자 도로를 조금 높게 올렸고, 포룸과 원형극장에는 보행자들을 위한 특별 구역을 지정해 교통소통을 원할하게 통제했다. 폼페이는 9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폼페이 시로 들어가는 관문 근처에는 여관과 마굿과, 병원이 이었고, 시내 중심 거리에는 선술집과 현재의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카페들은 로마인들이 공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후 간단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폼페이 유적 발굴을 통해 드러난 하수시설, 목욕탕, 시장, 극장, 원형 경기장,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은 2000년이라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현대의 그것과 비교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폼페이주변에는 당시에 덮였던 휴양도시인 폼페이와 더불어 Ercolando라는 마을이 존재한다. 이 역시 화산에 덮였던 도시로 폼페이와 더불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
이밖의 네로황제의 부인이었던 popaea Sabina의 집이었던 Oplotis가 있어 고대로마양식의 건축양식과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등을 볼 수 있다.
◈ 쏘렌토 (Sorrento)
돌아오라 쏘렌토로(Come back to Sorrento)"와 "오! 솔레미오(O sole mio)"는 모두 세계에서 가장 친숙한 가곡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폴리만의 색조와 친숙한 소음, 그리고 오렌지 숲으로 쌓인 소렌토는 역사와 예술을 자랑하는 평화와 고요의 천국이다.
쏘렌토(Sorrento)는 쏘렌타인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나폴리 근처의 도시이다. 예전부터 나폴리와 인접한 해안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 쏘렌토의 수공예 목조품과 치즈, 올리브유, 리몬첼로(limoncello)라 불리는 지방 특산품을 제외하고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절벽 위에 지어진 이 작은 도시에서 맑은 바다빛과 카프리를 가로지르는 햇살이 비춘다.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가 여기서 태어났으며, 타란텔라가 여기서 춤을 추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갖춘 가구와 그림 그리고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는 코레알 박물관도 가봄직한 곳이다.
스포르체스코 성
15세기 중엽 밀라노 대공 프란체스코 스포르체스코가 세운 것이다. 브라만테, 다 빈치 등이 건축에 관여했으며, 근대 성채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건물은 그 후 개축한 것이다. 성 안에는 고미술박물관(Museo d'Arte Antica)이 있다. 기원전의 고미술품으로부터 고대 로마, 중세,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최고 걸작은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라는 미완의 대리석상이다
두오모성당
영어의 돔(dome)과 같으며 라틴어(語)의 도무스(domus)를 어원(語源)으로 한다. 영어의 돔은 반구형(半球形)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의 뜻으로 사용되는 데 대하여 이탈리아어의 두오모와 독일어의 돔은 대성당(大聖堂:cathédrale)을 말한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주교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말하는데, 큰 도시에는 모두 두오모 성당이 있으며, 그 중 밀라노와 피렌체의 것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는 단순한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가장 중심적인 장소인데, 과거 도시계획자들은 한 도시를 건설할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두오모를 배치한 후 주변에 시민광장, 관청, 공공시설, 상가 등을 배치하였다
스칼라좌
1778년에 설립된 오페라극장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오페라극장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장 중 하나다. 1778년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교회 자리에 세운 것으로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개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공습으로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어 1946년 A.토스카니니(Toscanini)가 지휘한 역사적인 콘서트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V.사바타(Sabata), T.세라핀 등이 음악감독으로 재임하였고 2000년 현재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가 음악감독으로, 파올로 아르카(Paolo Arca)가 예술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다. 수용인원은 약 3,600명이다.
1778년 8월 A.살리에리(Salieri)의 오페라 《Europa Riconosciuta》를 개관 기념으로 공연하였으며, 베르디의 《오베르트》,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비롯한 많은 오페라가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사립극장으로 출발, 후원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박스를 구입하여 사용해오다 1921년 토스카니니, E.칼다라(Caldara), 상원의원 L.알베르티니(Albertini) 등의 노력으로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자치법인이 되었고 일반에 공개되었다.
부속기관으로는 스칼라극장오케스트라와 스칼라극장필하모니, 스칼라극장합창단, 스칼라극장박물관 등이 있다.
성모마리아대성당
하노버 남쪽 약 30km 지점에 있다.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로서 872년에 처음 세웠으며 힐데스하임의 주교 베른바르트가 1000년 무렵부터 개축하였다.
개축 건물은 1061년 완공하였는데, 이 즈음에 중앙 신랑(身廊)과 동쪽 익랑(翼廊)이 교차하는 부분에,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대성당 서쪽에는 네오로마네스크양식의 2층탑을 두었으며, 14세기 초에는 고딕양식의 보조예배실을 지었다. 동쪽 내진(內陣)과 맞닿아 있는 2층 회랑은 로마네스크양식이며 그 안뜰에는 유명한 '1000년 된 장미나무'가 있다.
건물 안에는 커다란 청동작품 2점이 있다. 서쪽 입구 안쪽에 있는 《베른바르트의 문》은 1015년에 만들었다. 문 1개를 통째로 주조한 최초의 작품으로서 성서의 여러 장면을 조각해 놓았다. 문의 높이 4.72m, 너비 1.12m이고 무게는 2t에 이른다. 부조는 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새겼는데, 왼쪽 문짝에는 《구약성서》의 원죄, 오른쪽에는 《신약성서》의 구원을 묘사하였다.
또 다른 작품은 《예수의 원기둥》으로서 1020년 무렵에 주조하였다. 이 기둥은 19세기까지 성미가엘성당에 있었으나 현재는 《베른바르트의 문》 부근에 놓여 있다. 높이 4m이고 안은 비어 있으며 나선의 띠가 기둥을 둘러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나선 사이에는 아래에서부터 예수의 일생을 24장면으로 나누어 부조로 조각하였다.
1985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성미가엘성당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미켈란젤로 언덕
미켈란젤로 광장에서는 두오모와 지오토 종탑,베키오 다리 등 피렌체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광장 중앙에는 < 다비드>상 복제품이 서 있다.
산타루치아항
산타 루치아는 나톨리 수호신의 이름이며 나폴리 해안거리의 지명이기도 하다. 이 해안에서 황혼의 바다로 배를 저어 떠나는 광경을 노래한곡으로, 1850년에 발표되고 그 후 나폴리의 어부들 사이에서 애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코트라우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아리아《그 얼마나 아름다운 마술사인가》를 듣고 암시를 받아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애창되고 있다.
폼페이유적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한 폼페이는 19세기에 들어서서 그 유적들이 발굴된다. 드러난 유적은 고대 로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폼페이 유적을 스카비(Scavi)라고 부른다. 유적지의 입구는 마리나 문(Porta Marina)으로 당시 마을에서 항구로 통하던 길의 성문이다. 이 부근에는 폼페이에서 가장 큰 건물인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주피터 신전 등이 있다. 중앙광장인 포로(Foro)에는 도리아식 원주가 서 있고, 포로를 왼쪽으로 돌아나가서 마첼룸을 지나면 주요 건물 유적들이 있다. 파우니의 집, 베티의 집, 큐피드의 집 등 당시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회화, 조각 등은 나폴리의 북쪽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바티칸박물관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家)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寫本)》 《여호수아기(記)》,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聖)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다
성베드로대성당
성베드로대성당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원은 성(聖)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세기에 한 번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舊堂)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D.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플랜의 중심에 대원개(大圓蓋)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그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會堂部)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바르다살레 베르레의 손을 거쳐 A.P.da 상갈로에게로 넘어갔다. 그도 또한 궁륭(穹)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造營)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基部)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木製)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볼타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그러나, 17세기 초기 신랑(身廊)의 전면(前面)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獻堂式)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G.L.베르니니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C.마데르나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트레비분수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G.L.베르니니의 원안(原案)에 따랐다고 하는 N.살비 설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비 사후인 1762년에 완성하였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像)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巨岩巨石)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속신(俗信)이 있다.
콜로세움경기장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곳은 콜로세움. AD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착공되어 8년간의 공사 끝에 낙성식을 가진 원형경기장이다. 둘레가 527미터, 높이 57미터의 타원형 4층 건물이다.
옛날 이곳에서 경기는 투사끼리 죽을 때까지 벌이는 격투와 야생동물과 노예와의 사투 등 귀족들을 즐겁게 해주는 잔인한 경기가 연일 벌어졌다. 크리스트교 박해때는 맨손의 크리스트교인이 굶주린 야수에세 숱한 죽음을 당했다. 선혈이 뿌려지는 것을 보고 열광하던 당시 로마 시민의 잔혹성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태리
일정]
◇ 2006.02.20
○
06:00 비를 맞으며 아침 조깅
○ 08:00 호테 출발
○ 09:20 휴게소 도착 유료 화장실 이용
○
10:50~12:00폼페이 도착 유적지 관람(현지 가이드)
○ 12:00~12:40 중식
○ 12:45~13:10 전철로
쏘렌토
○ 13:40~14:00 여객선으로 섬으로
○ 14:10~15:50 25인승 버스 및 케이불카로 정상 왕복
○
16:10~17:40 여객선으로 나폴리로
○ 17:40~19:00 로마로
○ 19:00~20:00 석식(한식)
○ 21:00
로마 도착
◇ 2006.02.21
○ 08:00~12:00 바티칸시 입성 시스티나 대성당등 관람
○
12:00~13:00 중식
○ 13:00~14:30 트레비분수 관람
○ 14:30~16:00 콜로세움 주변 관람
○ 17:30 영국으로 이동(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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