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마라톤

등산,마라톤, 사진 촬영을 좋아서

등산/등산자료

팔공산 오도암

산과마라톤 2008. 1. 29. 10:13

 

 

 

 

 

팔공산 오도암

 

 

통일신라시대 가장 성스러운 산 다섯이 있었는데 동서남북에 위치한 4개의 산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중앙에 있는 산을 중악(中岳)이라 했다. 공산이 중악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팔'과 '공'이 합쳐진 팔공산이라는 명칭은 기록으로는 조선초기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에 가장 먼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팔공산 명칭에 관해 4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팔공산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이때 왕건의 장수 신숭겸 등 여덟명이 순절해 이 여덟 장수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두번째는, 팔공산이 여덟 고을에 걸쳐 넓게 분포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세번째는, 원효 등 여덟 성인이 도를 깨달았다는 장소라는 설.
네번째는, 심지대사가 속리산에서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진율율사의 팔간자를 얻어와 동화사에 봉안한 것에서 기인 했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팔공산의 주인공은 김유신과 원효스님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원효가 29살에 출가를 결심할 즈음 김유신은 벌써 51세의 노장이었고, 자장은 57세쯤 된 나이로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효와 비슷한 세대로는 의상대사를 꼽아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는 원효보다 8살 연하인데 두 사람은 중국유학을 함께 떠나려 준비할 정도로 뜻맞는 도반이기도 했다.

원효가 팔공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34살 이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해에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귀환한 뒤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10여년의 세월을 팔공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경산지역 불굴사와 팔공산 오도암에서 수도한 뒤 팔공산 원효굴에서 득도했다"는 것이다. 원효굴은 우리가 어린시절 오도암 바로 뒤의 어느 부분에 있더라고 들은 적이 있다. "사각형에다 천장부위가 아치형인 입구를 가진 큰굴"이었으며, "그 복판은 바닥암반에 두사람이 목욕할만큼 깊이 1m가량의 절구형 홈이 패였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 가득찬 그 홈 밖의 빈자리로 5~6명은 충분히 앉을만한 크기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팔공산에서 활동하던 때는, 불교계로서도 여건이 상당히 좋았던 시절일 듯하다. 신라의 불교 공인(527년) 120여년 후여서 활동 기반이 탄탄했을 때일 뿐 아니라 그 당시는 신라의 최전성기이기도 했다.

통일 당시 김유신은 73세, 원효는 51세, 의상은 43세였을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활동하던 시기 팔동산에 지어진 절로 전문가에 의하면 서기 493년에 창건한 군위삼존석굴과 서기 640년 전후 창건된 부인사 등을 들 수 있다. 거기다 원효 스님이 삼성암(정상부 삼성봉 남쪽사면), 오도암(삼성봉 서쪽사면),원효암(와촌 갓바위골 솔뫼기 마을부근), 그리고 경산지역에 불굴사를 세웠고, 650년 쯤엔 자장율사와 함께 수도사(치산계곡)를 창건했다고 한다.

의상스님은 은해사 골에 운부암을 세우고, 미리현(해안현)에는 미리사(美理寺)를 세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절들이 팔공산에 세워졌던 초기 사암들이었다는 얘기이다. 특히 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일명:도인)이 군위삼존석굴(제2석굴암)에는 정남향으로 천하의 명당인데 1,000m 밑의 지기가 올라온다며 군위삼존석굴(제2석굴암)에서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많은 소원을 이룬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팔공산 우리지역 청운대 바위중턱 원효굴(오도암 뒷편)에서 득도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볼때 중요한 의미가 있고 앞으로 매우 가치있는 테마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또한 과거 오도암에 모시고 있던 오도암금동불입상 1구가 도문화재로 지정예고 중에 있는데 조만간 문화재로 지정되면 국.도비를 지원받아 옛 오도암 복원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원효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오도암 서당굴 : 오도암(悟道庵)은 팔공산 제일의 명당으로 알려진 절터이다.  팔공산 비로봉 청운대 절벽 밑에 자리했다.

   팔공산에서 진부암, 삼성암과 함께 삼고소사암(三高所寺庵)이다. 이 절은 원효대사가 수도하여 오도(悟道)한 곳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오도암(悟道庵)이라  한다.

임신년(壬申, 1932년) 석천산인(石泉散人) 홍재하 찬(洪載夏 撰) 오도암(悟道庵) 중건기에
羅時有五法侶開山 結茅修禪悟道 故元曉大師因創是庵而名之
라시유오법려개산 결모수선오도 고원효대사인창시암이명지

라는 글이 있다.

    조선 이래의 팔공산이라는 산명은 원효대사의 제자 일천중(一千衆)이 양산 천성산(원효산)에서 원효문화(元曉門下)에서 수업하고 수도하여 988인이 오도(吾道)하고 나머지 12인중 8인이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에 가서 오도(悟道)하여 팔공산이라 하고 4인이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에 가서 오도(悟道)하여 사불산(四佛山)이라 했다 한다.

    팔공산에  들어온 8인 가운데 3인은 삼성암(三聖庵)에 오도하여 삼성암(三聖庵)이라 했고 5인이 오도암(悟道庵)에서 오도(悟道)했다하여 오도암(悟道庵)이라 했다는 전승이 내려왔다.
  그러나 8인이 팔공산(八公山)에 입산 오도(悟道)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것은 팔공 자를 가지고 만든 전설인 듯하다.

    이 산이 신라시대에는 공산 혹은 부악(父岳) 혹은 중악(中惡)이라 불렀고 팔공산(八公山)이라 하지 않았다.  팔공산(八公山)이라 한 것은 조선시대 때부터 부르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러나, 사불산은 진평왕 9년 갑신(甲申) 즉, 원효(元曉)가 나기 30년 전에 벌써 있었다는 전설이 고려시대까지 내려왔고 이 때 대승사(大乘寺)가 창건된 듯하다.

  이와 같이 8인의 팔공산 입산과 4인의 사불산 입산 설화는 후대의 조작인 듯 하다.
이 설화가 오도암(悟道庵) 원효 설화와 같이 위와 같은 오도암(悟道庵) 유래(由來)를 낳았다
오도암(悟道庵)은 원효(元曉)의 증오처(證俉處)로 전승(傳乘)되었다.
증오(證俉) : 불도를 닦아 대도(大道)를 깨닫는 것

  전설에 따른 원효굴 탐사 소개문 (매일신문 88년 11월 4일자에 <원효대사 득도 석굴 발견>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을 적어본다.

  해발 1050m 청운대 정상 가까이의 절벽에서 원효굴을 찾았다.
굴의 규모는 길이 280cm, 굴입구 높이 80cm의 둥근 원통형의 굴엔 쌍봉 낙타모양의 두 돌기가 파여 올라가 있다. 이 굴은 청운대 천인 절벽의 정남면에 남향하여 인공으로 굴착한 횡혈(橫穴)석굴이다.

   겨울에는 햇볕이 굴 안에까지 들어가고,  여름에는 굴 안에 햇볕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굴의 맞은편 굴에 아래로 100m 가량 떨어진 밑에 남에서 북으로 굴착한 석굴이 있다. 이 굴은 이 원효굴과 굴의 방향이 마주보고 있다.

   이 굴의 뒤에서 쳐다보면 원효굴이 보인다. 아마도 원효굴과 유관한 굴일 것이다. 제자 상좌나 시종자(侍從者)들이 거처했을 것 같다. 이 굴은 안으로 길이 1.7m, 굴 높이 1.8m, 넓이 1.7m이다.

   원효굴의 입구 오른편 절벽에 명문(銘文)이 조각되어 있다. 글씨 석자가 조각되어 있다. 가로 세로 7cm 가량의 크기로 썼다. 위의 글자는 서(誓)자가 확실하다. 그러나 밑의 두 자는 마모가 심하여 매우 판독하기
어렵다. 둘째 자는 당(幢)자로 읽힐 가능서이 농후하고, 셋째 자는 굴(窟)자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당(幢)자와 굴(窟)자를 합아면 서당굴(誓幢窟)로 판독하여 지금도 서당굴(誓幢窟)로 읽히고, 글자체는 해서체다. 이 서당굴(誓幢窟)은 원효가 유명하게 되자 그의 법사들에 의하여 기념하기 위하여 각자(刻字, 글자를 새기는 것)했다고 보겠다. 글자의 마모 상태나 자체로 보아 신라시대의 각서(刻書)로 보겠다.

    이 석굴까지 가는 길은 절벽에 옆으로 난 祖道를 따라 오르내리며 비스듬이 올라간다. 극히 위험한 길이고, 길 아래는 수백 미터의 절벽이다. 원효 당년에는 운제(雲梯) 위잔(危棧)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랜 구비 전승과 이 원효굴은 신기하게도 부합되었다.

   이 굴은 오도암(悟道庵)에 딸린 수도석굴이다. 이 굴은 천고의 신비 가려 운무속에 감춰져 내려왔다.
오도암은 1963년이래 폐사가 되어 유허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기왓장과 주초와 맷돌 바위만이 널려있고, 빼어난 상호의 불상과 고탱화가 당시까지 전세(傳世, 대대로 전하여 가는 것)되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이상이 발굴 당시의  내용이다.
해발 800m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남향으로 원효가 오도암(悟道庵)과 원효굴(서당굴)에서 오도했다는 전승은 사실로 전한다.

'등산 > 등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맥자료  (0) 2008.04.19
팔공산 산줄기(매일신문)  (0) 2008.04.08
t수도-가야 사진(훔쳐 온 것)  (0) 2006.07.29
오산종주(2)  (0) 2006.04.07
한북정맥 구간별 거리  (0) 2005.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