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
전망대로 오르는 길 옆 잔디밭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다
종무지가 1964년 신대마도지에 기고한 글과 그림으로 아랫부분의 그림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콤파스를 돌려 그린 세계지도이다
종무지의 야망이 담겨 있는 이 글의 내용은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모양을 깎으면서 가만히 바다의 조류를 본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
깊은 밤 세계지도를 펴고
콤파스를 잡아 섬(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
카이자카 전망대(385m)
카이자카전망대에서 본 시라타케
.전망대에 올라서서 약간 왼쪽으로 보면 멀리 두개의 높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대마도의 영산으로 불리는 시라타케(백악산)이다.
이 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이다.
기존에 대마도를 지배하던‘아비루’家(우리나라에서 넘어간 백제계의 씨족)와 일본 규슈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宗)家가 1245년 이곳 카미자카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家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보다는
대마도 원 씨족과 일본도래족의 정권싸움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선국통신사비
선조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 467명을 시작으로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둔 비석으로 대마민속 역사 자료관 앞에 있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출발에 즈음하여 정사, 부사와 종사관 3사신은 서울(한성부) 창덕궁에서 국왕을 알현하며 이때 국왕이 직접 국서를 전교한다.
총 500명에 가까운 통신사 일행은 서울을 떠나 육로로 부산에서 재집결하여 출항을 기다린다. 사절단은 기선(騎船)이라 불리는 배 3척에 나누어 타게 된다, 정사선(正使船)은 길이 약 40미터, 약 150명이 타는 큰 배이다.
이윽고 길일(吉日)을 골라 연가대(永嘉台 부산 자성대 소재)에서 해신(海神)에게 항해의 안전을 비는 기풍제(祈風祭)를 올린 뒤 모든 선박이 같은 뱃길을 따라 대마도로 향한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는 가장 가까운 곳이 약 50킬로, 순풍으로 파도가 잔잔한 날은 쾌적한 뱃길을 즐길 수 있지만, 그 때는 기상 정보가 충분치 않았던 시대라 어려운 항해를 피할 수 없었다. 가끔은 선체가 손상되거나 배 멀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단은 일단 대마도 최북단, 사스나우라(佐須那浦) 또는 와니우라(鰐浦)에 도착한다. 거기서부터 선단은 대마번이 보낸 뱃길 안내선의 보호를 받으며 시계 바늘 방향으로 섬의 작은 포구 서너 곳을 둘렀다가 드디어 후츄(府中- 현재의 이즈하라)에 도착한다.
이즈하라에서는 대마번주와 이테이안의 장로 두 사람이 탄 배가 항구 밖까지 출영하여, 배에서 최초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통신사 일행은 이즈하라에서 적어도 10일간, 긴 경우는 3주간을 머물게 된다. 배를 보수하거나 식량 등을 조달하고 게다가 바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체류하는 동안에는 대마번주의 초청향연이 있으며 이곳의 인사들과 교류를 한다.
조선통신사들의 숙사는 때에 따라 특별히 설치된 관사이거나 류효인(流芳院), 케이운인(慶雲院), 다이헤이지(太平寺) 등의 큰 사원으로 정해졌다.
대마를 출발한 통신사선단은 다시 해협을 건너 이키섬에 도착한다. 이 사이의 항로도 강풍이 자주 부는 험난한 해역이어서 통신사가 탄 배도 자주 선체가 손상되었다.
이키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하카타(博多)만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노시마(相島, 藍島)에 도착한다.
후쿠오카번의 영지로, 주위가 약 6킬로미터인 이 섬은 큐슈 본토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초생달 모양의 양항이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선단의 기항지로 정해졌다. 이어 선단은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항해하면서 여러 곳을 둘러 약 2개월의 긴 항해 끝에 오사카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통신사 전용 선단을 정선시키고 육로로 교도와 비와코(琵琶湖)를 지나, 나고야, 시즈오카, 하코네 등 나카센토(中線道)를 따라 에도로 갔던 것이다.
고려문
대마시청
유치원생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이왕가(李王家)라는 말을 썼을까?
일본인들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족을 낮춰 부르는 말이 '李王朝'라는 말인데 우리 조선인단체에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말을 썼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처음 팔번궁 앞 지금의 서일본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1955년 종무지(종무지)와 이혼 후 이를 쓰러트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취항 후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이 자리에 다시 되세웠다
.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5월 쓰시마섬[?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였다. 이후 순탄하지 못한 생활로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서산사
이즈하라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382번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서산사라고 적힌 패찰의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이 나타나고 바로 앞에 사찰 건물이 눈앞에 닿는다.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이테안이 있는 곳이다.
서산사 뒷편의 대숲에는 제주 4.3 양민학살 사건 때의 억울한 영혼들이 묻혀 있다
제주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군경들에게 붙잡혀 사살되고 그대로 바다에 버려진 시체들이 해류를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대마도 어민들이 수습하여 이곳 서산사와 태평사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하며
1948년 제주 4·3항쟁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을 피해 이곳 쓰시마까지 도망쳐왔는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자, 그들의 시신을 안치한 절도 바로 이 서산사이다
고려문(高麗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金石城)>을 만들고 정문 즉 영은문으로 만든 문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려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현재의 고려문은 원래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끼바라 성에 있던 것으로 1987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진 것을 현재 대마 역사민속 자료관 앞에 복원한 것이다.
금석성의 정문은 노문이라 하여 망루역할을 하는 문이며 고려문은 노문을 들어서서 성 안에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순전히 환영한다는 영접의뜻으로 세운 문으로 <조선통신사>들이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