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곳에는 조선의 명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함께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선생의 시비가 있다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 세운 비로서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대마도에 들려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동안 승려 겐쇼와 맺은 친분 때문에 이곳에 세운 것 같다
(시비의 내용)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道學者)였다. 대과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하여 국가 외교와 문화 사절로 일본국을 향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宣慰使) 현소승(玄蘇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이 깊은 시 한 수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서산사의 원래 명칭은 대일암으로 1513년 10대도주 <소 사타쿠니>의 <니시야마(西山) 부인 보리사가 西山寺로 개칭하였다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대마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테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산사는 사찰로서보다 다른 이유로 해서 우리나라와 관련을 맺는다.
이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다.
대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이곳을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떼이안이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바람에 이떼이안이 세이산지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세이산지)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대마도에 있는 일본의 사찰과 우리마라의 사찰이 다른 점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사찰은 열려 있는데 일본의 사찰은 항상 닫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거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방문하여 사찰측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사찰의 내부를 쉽게 볼 수가 없다.
또한 일본의 불교가 대부분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부인과 자식 을 두고 있으며 출퇴근을 하는 월급제 승려가 대부분이다.
팔번궁신사ㅡ최익현선생의 첫번째 유형지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의 하얀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의 앞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식-고구마국수와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