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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연수

대마도_05

산과마라톤 2009. 3. 13. 18:12

 

 

 

 

또 이곳에는 조선의 명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함께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선생의 시비가 있다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 세운 비로서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대마도에 들려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동안 승려 겐쇼와 맺은 친분 때문에 이곳에 세운 것 같다

 

(시비의 내용)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道學者)였다. 대과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하여 국가 외교와 문화 사절로 일본국을 향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宣慰使) 현소승(玄蘇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이 깊은 시 한 수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서산사의 원래 명칭은 대일암으로 1513년 10대도주 <소 사타쿠니>의 <니시야마(西山) 부인 보리사가 西山寺로 개칭하였다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대마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테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산사는 사찰로서보다 다른 이유로 해서 우리나라와 관련을 맺는다.


이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다.

대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이곳을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떼이안이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바람에 이떼이안이 세이산지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세이산지)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대마도에 있는 일본의 사찰과 우리마라의 사찰이 다른 점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사찰은 열려 있는데 일본의 사찰은 항상 닫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거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방문하여 사찰측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사찰의 내부를 쉽게 볼 수가 없다.

또한 일본의 불교가 대부분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부인과 자식 을 두고 있으며 출퇴근을 하는 월급제 승려가 대부분이다.

 

 

 

 

 

 

 

 

팔번궁신사ㅡ최익현선생의 첫번째 유형지

 
면암의 처음 유형지는 시내의 중앙에 있는 하치만(팔번궁,八幡宮)신사의 좌측 광장이다.
면암은 우리나라에서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압송(押送)’되어 바다를 건너 이즈하라 항구로 들어 왔다.
1906년 8월 28일 이른 아침이었다. 대마도 측은 ‘호송(護送)’이라고 적고 있다.
경비보병대대 소위가 신병을 인도 받았다. 그리고 항구에서 가까운 이곳 팔번궁신사 앞마당으로 압송되어 왔다.
그리고 신사 경내 남측에 사족수산소(士族受産所) 자리에 있던 임시 수용소에서 유형이 시작되었다. 태인군수 임병찬(林炳瓚)과 함께였다.
 
그들은 1906년 6월 11일 의병투쟁 중 전남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6월 16일 서울로 압송되었고 8월 4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조선군주차사령부(朝鮮軍駐箚司令部) 헌병대 군법회의에서 최익현은 징역 3년, 임병찬은 징역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당시 우리의 사법기관이었던 평리원(平理院)에는 가 보지도 못하였다.일제는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이들의 죄목이라는 것도 항일의병 투쟁을 한 죄였다.
 
면암이 이곳에 끌려 왔을 때 이곳에는 이미 붙들려 와 있는 한국인 의병 9명이 있었다.
그들은 러일전쟁(1904-1905) 중 일제에 의해 잡혀 왔다고 한다.
면암과 그 일행 12명은 여기서 합류, 영어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쯔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지어질 때까지 3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단층짜리 임시가옥은 헌병대 관리하에 있었다. 면암은 매일 서쪽을 향해 재배(再拜)를 했다. 그곳은 고종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지금 이곳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면암이 가끔 거닐었을 신사 광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수선사
수선사라는 돌명패의 옆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선생의 비석이 서 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 년 한·일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의 하얀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의 앞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측의 황수영(黃壽永)박사가  비문을 썼다고 한다
 
비석 뒷쪽의  무궁화가 새순이 나와 제법 파랗다. 처음 순국비를 세운 동국대 교수팀이 심은 것인지, 그 이후에 찾은 한국인들에 의해 심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본 무궁화는  순국비와 함께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일화에 의하면
최익현선생의 신발속에는 항상 흙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흙은 대마도로 끌려갈 때 몰래 가지고 간 우리나라의 흙으로 조금씩 신발에 깔아서 다닌 것은 일본의 흙은 밟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의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까지 일본을 부정한 것이다 
 
 
구마모토(熊本) 진대(鎭台) 대마분견대(大馬分遣隊)의 '사지키바라 옥형(棧原屋形)’에서 수형을 받던 면암선생은 1907년 1월 1일 새벽 4시 숨을 거둔다
 
사후(死後) 그의 시신은 경비대 내 영안소에 안치되었다가 이즈하라 항구 가까이에 있는 이곳 수선사로 옮겨졌다. 그리고 본당에 안치되었다.
 
이곳에서 간단히 장례식을 치룬 뒤 1월 4일 한밤중 면암의 시신은 이즈하라 항구를 빠져나갔다.
4개월을 수형생활을 보낸 대마도를 뒤로하고 겨울 바다로 나갔다.
배는 부산을 향해 갔다

 

 

 

 

 

 

 

 

 

 

 

 

 

 

 

 

 

 

 

 

 

중식-고구마국수와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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